논문 붙잡고 있을 때보다 편의점 다녀올 때 진도가 더 나갔다
논문 쓰던 시절 얘기다. 새벽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서 같은 문단을 몇 시간째 붙잡고 있었던 적이 많다. 커서만 깜빡이고,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그렇게 붙잡고 있어도 정작 진도는 거의 안 나갔다.
그러다 잠깐 숨 돌리려고 편의점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잠깐 사이에 오히려 막혔던 부분이 풀렸다.
편의점에서 뭘 대단히 고민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걸어갔다 왔을 뿐인데.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논문을 붙잡고 씨름할 때보다, 잠깐 자리를 뜨고 왔을 때 오히려 문장이 더 잘 풀렸다. 그때는 그냥 “머리를 식혀서 그런가” 정도로 넘겼는데, 돌아보면 그 순간엔 좀 부끄러운 느낌도 있었다. 논문 써야 하는데 편의점이나 다녀오고 있다는 게, 그 자체로 게으른 행동처럼 느껴졌으니까.
미국 연구진이 이 현상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2025년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브레인 앤 크리에이티비티 연구소의 콜린 맥대니얼, 아살 하비비, 조나스 카플란 연구팀이 저널 Scientific Reports에 발표한 연구가 있다.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소재로 짧은 소설을 두 편 쓰게 했는데, 그 사이에 10분짜리 휴식을 끼워 넣었다. 이 휴식은 네 가지 방식으로 나뉘었다. 단순 반응 과제(0-back), 약간 더 어려운 기억 과제(2-back), 마음챙김 명상,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휴식이었다.
연구진은 각 참가자가 휴식 시간 동안 얼마나 “멍때렸는지”를 설문으로 측정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설을 쓸 때, 참가자 절반에게는 첫 번째와 같은 소재를, 나머지 절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소재를 줬다. 창의성 평가는 사람이 직접 채점하는 방식과, 문장 사이 의미적 거리를 계산하는 방식, 그리고 GPT-4로 교차 검증하는 방식을 함께 썼다.
결과가 흥미로웠다. 휴식 방식 자체(반응 과제냐 명상이냐)는 창의성 향상에 큰 차이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방식과 무관하게, 휴식 시간 동안 얼마나 멍때렸는지가 창의성 향상을 예측했다. 그런데 이 효과는 같은 소재로 계속 쓸 때만 나타났다. 완전히 새로운 소재를 받은 그룹에서는 멍때림과 창의성 향상 사이에 관계가 없었다.
· 휴식의 종류(명상 vs 단순 과제)는 창의성 차이를 만들지 않았다
· 휴식 중 멍때린 정도가 클수록 창의성 향상폭이 컸다
· 단, 이 효과는 같은 문제를 계속 붙잡고 있을 때만 나타났다
· 새로운 문제로 바뀌면 멍때림의 효과는 사라졌다
연구진은 이 현상이 특정 유형의 사고,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소설 내용을 떠올리려는 생각이 아니라 정처 없이 흘러가는 멍때림 자체에서만 나타난다는 점도 확인했다. 즉 “그 문제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는 휴식”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휴식”이 핵심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아무 때나 멍때리면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연구를 보고 나서 그 편의점 다녀오던 밤이 좀 다르게 다가왔다. 그때 내가 멍때리고 있었던 문제는 새로운 게 아니라, 몇 시간째 붙잡고 있던 그 논문 문단이었다.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다 온 게 아니라, 같은 문제를 머릿속에 걸어놓은 채로 잠깐 놓아버린 셈이었다. 이 연구 결과대로라면 그게 핵심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걸 “멍때리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좀 위험해 보인다. 새로운 문제, 그러니까 아직 붙잡아본 적도 없는 일을 앞에 두고 멍때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 오히려 이런 효과는 이미 어느 정도 씨름해본 문제, 머릿속에 재료가 쌓여 있는 상태에서만 작동하는 것 같다. 아무 재료 없이 멍때리기만 하면 그냥 멍때리는 걸로 끝나는 거고. 논문 쓸 때 “잠깐 멍때리다 왔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좀 애매하다. 근무 태도든 학업 태도든 딱히 좋게 보이지도 않고. 그런데 이 연구를 알고 나니, 적어도 나 스스로는 그 시간에 죄책감을 덜 느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매번 그렇게 풀리는 것도 아니라서, 이걸 무슨 확실한 팁처럼 쓰기엔 아직 조심스럽다.그러고 보니 요즘은 이런 멍때리는 시간 자체가 많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편의점에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다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신호 기다릴 때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예전 같으면 그냥 멍하니 흘려보냈을 그 자투리 시간들이 이제는 거의 다 화면으로 채워진다. 이게 혹시 사람들의 업무 능력이나 창의력에 은근히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이 부분까지 직접 검증한 연구를 본 건 아니라서 확신은 없다. 그냥 편의점 가는 길에 스마트폰 들여다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참고 : McDaniel, C., Habibi, A., & Kaplan, J. (2025). Mind wandering during creative incubation predicts increases in creative performance in a writing task. Scientific Reports, 15, Article 24629.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