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예전에 『NHK에 어서오세요』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다. 은둔형 외톨이 청년이 주인공인 작품인데, 그때는 그게 일본 특유의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좁은 방, 과한 경쟁, 독특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그 나라만의 이야기 정도로 여겼다.
그 생각이 바뀐 건 최근이다. 유튜브를 보다가 고립·은둔 상태인 사람의 방을 치워주는 청소업체 영상을 보게 됐다. 발 디딜 틈 없이 쌓인 쓰레기, 몇 년은 손대지 않은 듯한 방의 모습에 꽤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게 일본 만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고립과 은둔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관련 통계와 연구를 찾아봤다.
이 글은 고립·은둔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룹니다.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면, 글을 읽는 것보다 109(정신건강 상담전화, 24시간·무료)에 먼저 연락하시는 걸 권합니다.

54만 명,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숫자가 아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3년 실시한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김성아 외, 2023)는 이 주제를 다룬 국내 최초의 전국 단위 조사다. 여기서 ‘고립 청년’은 타인과의 유의미한 사회적 관계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지체계가 부족하거나 결핍된 청년을, ‘은둔 청년’은 그중에서도 방이나 집처럼 제한된 물리적 공간에서 주로 생활하는 청년을 뜻한다.
이 기준으로 전국 19~34세 고립·은둔 청년은 약 54만 명으로 추정됐다. 정확한 규모를 전수조사한 값이 아니라 표본조사를 바탕으로 한 추정치이고, 조사마다 정의와 방법이 다르면 숫자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3.7점으로 일반 청년(6.7점)의 절반 수준이었고, 정신건강 지표 전반에서도 일반 청년과 큰 격차가 나타났다.
이 수치들은 분명 무겁다. 다만 이 글에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건 “몇 명이나 되느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됐느냐”다. 심각성의 크기보다, 그 앞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관계 문제이기 전에 진로 문제였다
같은 조사에서 고립·은둔 상태가 된 이유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진로 및 취업의 어려움'(24.1%)이었다. ‘대인관계의 어려움'(23.5%)이 근소한 차이로 뒤를 이었고, ‘가족관계'(12.4%)와 ‘건강 문제'(12.4%)가 비슷한 비중으로 나타났다. 두 응답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건, 관계 단절이 원인이 아니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여러 요인이 겹쳐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도 순서를 보면 눈여겨볼 지점이 있다. 흔히 고립·은둔이라고 하면 대인관계 실패를 먼저 떠올리기 쉬운데, 진로·취업 문제가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근소하게 더 많이 꼽혔다. 이 글 앞서 다룬 청년 번아웃 조사에서도 번아웃을 겪은 이유 1위가 ‘진로 불안'(39.1%)이었다. 조사 대상도, 질문도, 시점도 다르지만 같은 자리에 진로·취업 문제가 놓여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번아웃이든 고립이든, 그 출발점에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감각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뜻이다.
문제는 취업이 안 되는 것 자체보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노가빈·이소민·김제희(2021)가 은둔 경험이 있는 청년 5명을 심층 인터뷰해 분석한 질적 연구를 보면, 은둔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연구는 이 과정을 크게 세 국면으로 정리했다. 먼저 사회적 배경과 환경이 쌓이는 국면, 이어서 사회적 관계가 줄어들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는 국면, 그리고 그 상태가 길어지면서 정서와 행동 자체가 바뀌어 가는 국면이다. 이 연구가 꼽은 첫 번째 배경 요인이 흥미로운데, 저성장과 고용 불안정 속에서 반복되는 저임금·단기 계약을 겪으며 정신적·육체적으로 소진(burn-out)된 뒤 스스로 관계에서 물러나는 경우였다. 두 번째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겪은 정서적 고립으로, 비공감적인 양육 방식이나 또래 관계의 어려움이 배경이 된 경우였다. 연구는 이 흐름이 대개 일시적인 휴식으로 시작되지만, 길어질수록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느끼는 무력감으로 굳어진다고 봤다.
‘소진’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연구가 그리는 은둔의 첫 단추는 앞서 살펴본 청년 번아웃과 거의 같은 자리에 있다.
이 틀을 빌리면 그 청소 영상 속 방도 다르게 보인다. 그 방도 처음부터 발 디딜 틈이 없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며칠 약속을 미루고, 연락을 피하는 게 익숙해지고, 나갈 이유를 못 찾는 날이 늘어나는 동안, 방을 치울 이유도 함께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밖에 나가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나가는 데 필요한 심리적 문턱은 더 높아지고, 그만큼 방 안의 무너진 질서를 되돌릴 여력도 줄어든다.

혼자 사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고립·은둔을 1인가구나 사회적 고립 일반의 문제로만 보면 놓치는 부분이 있다. 같은 실태조사에서 ‘객관적 위기’로 분류된 청년 중 실제로 혼자 사는 사람은 30.1%뿐이었다. 나머지 69.9%는 가족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수치는 1인가구 고립감 글에서 자세히 다뤘다. 즉 물리적으로 혼자가 아니어도 고립될 수 있고, 반대로 혼자 살아도 관계가 촘촘한 사람도 있다. 진로·취업의 벽에서 시작된 위축이 관계 자체를 좁히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동거 여부와 무관하게 같은 과정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다.
완벽한 설명은 아니다
몇 가지는 한계로 남겨야 한다. 노가빈 외(2021) 연구는 심층 인터뷰 5명을 분석한 질적 연구라 그 자체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원인 응답 역시 응답자 스스로 고른 것이라 실제 인과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렵고, 조사 시점(2023년)과 정의 기준에 따라 규모나 비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도 이 조사와 연구들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건 있다. 고립과 은둔은 관계를 싫어해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진로나 취업처럼 아주 현실적인 벽 앞에서 조금씩 위축되다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청소 영상을 보며 놀랐던 것도 결국 이 지점이었다. 방이 그렇게 되기까지, 그 사람이 처음부터 관계를 거부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위축되기 시작한 다음이다.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주가 몇 달이 되는 동안 누구도 그 흐름을 끊어주지 않을 때, 방도 사람도 서서히 그 상태에 맞춰진다.
이 글은 공공 통계와 학술 연구를 개인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의학적·심리학적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고립·은둔이 길어지거나 힘든 생각이 든다면 전문가와의 상담을 권합니다. 정신건강 상담전화 109(24시간, 무료).
참고문헌
김성아 외. (2023).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 연구.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가빈, 이소민, 김제희. (2021). 청년 은둔형 외톨이의 경험과 발생원인에 대한 분석. 한국사회복지학, 73(2), 57-81. https://doi.org/10.20970/kasw.2021.73.2.003 (배경 요인 세부 내용은 반디뉴스 리뷰 기사를 통해 확인)
공병훈. (2024. 7. 27). 청년 은둔형 외톨이, 이들은 왜 단절되었는가? 반디뉴스. https://www.band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